焚書坑儒 분서갱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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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노트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10월 22일 (목) 08:4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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焚書坑儒 분서갱유

   불사를 분      글 서      구덩이 갱      선비 유  

분서갱유(焚書坑儒) 관련 설명

진나라 시황제가 정부를 비방하는 언론을 봉쇄하기 위하여 서적을 불사르고 선비를 생매장한 일  

진시황 즉위 34년에 진시황은 함양궁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박사들 70명이 앞으로 나와서 수를 빌었다.

복사(僕射)인 주청신 앞으로 나아가 황제의 위덕을 칭찬하여,

“폐하께서 천하를 통일하시고, 제후들의 땅으로써 군과 현으로 하셨기 때문에, 백성들은 다 즐거움에 편안하고,

전쟁의 걱정이 없으며, 그 덕을 만세에 전하게 되었나이다.

예로부터 폐하의 위덕을 따를 사람이 없나이다.”라고 말했다.

진시황은 기분이 좋았다.

그러자 박사인 제나라 사람 순우월이 앞으로 나아가서,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은나라와 주나라가 왕 하기를 천여 년, 자제와 공신으로 봉하여 번병으로 삼았다고 하나이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는 천하를 통일하셨으면서도, 자제들은 아무런 벼슬도 없는 필부에 불과합니다.

만일 갑자기 제나라의 전상이나 진나라의 육경과 같이 왕실을 빼앗는 역신이 나타날 경우,

황실을 보좌할 제후가 없으면, 어떻게 구원할 수 있겠나이까?

모든 일은 옛날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서는, 능히 오래도록 보존해 나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나이다.

지금 청신이 앞으로 나와, 폐하의 잘못을 거듭하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나이다. 이런 자는 충신이라고는 말할 수 없나이다.”

진시황은 순우월의 주장을 신하들에게 토의시켰다.

승상인 이사가 논하여 말했다.

“옛날의 오제라고 불려지는 사람들과, 夏․殷․周의 삼대의 정치는, 어느 것이나 전대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 아니라,

각자 독자적인 시책으로써 치적을 올린 것이다. 그것은 정치의 道가 상반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시대가 변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폐하께서는 대업을 일으키시어, 만대에 전할 만큼 공을 세우셨지만,

이런 일은 처음부터 어리석은 선비가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순우월의 말은 夏․殷․周의 3대를 이야기한 것으로, 법도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과거의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을 때에는 유세하는 선비를 초빙했다.

지금은 이와는 달라 천하는 이미 정하여졌고, 법령은 하나로 나오고 있다.백성들은 집에서 농사에 힘쓰고,

선비들은 법령을 배워 금하는 법령에 저촉되지 않도록 힘쓰고 있다. 그런데 여러 학자들은 지금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옛날을 배워,

이로써 현대의 정치를 비방하여 백성들을 당황시키고 있다.

옛날에는 천하가 혼란해져도 능히 이를 통일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제후들이 아울러 일어나서,

말은 옛날을 빌려 지금을 배척하고, 거짓말을 꾸며 진실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은 모두 각자 배운 것만을 선으로 삼고,

위에서 정한 것을 배척했다. 지금은 이와는 달라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시고, 흑백을 분명히 밝히시어,

존중해야 할 법도를 오직 하나로 정하시었다.그런데 지금 자기가 배운 것으로써 서로 모여 법령을 배척하는 자들은,

법령이 내려온 것을 들으면, 각자가 그 학문의 입장에서 이를 토론하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

이를 비난하거니와 밖에 나와서는 거리에서 이를 비판한다. 임금을 받드는 일을 자랑으로 삼고,

의를 부르짖는 것을 고상하다고 하여, 제자들을 이끌어 비방케 한다. 이와같은 일을 금하지 않는다면,

위로는 임금의 권위와 세력을 저하시키고, 아래로는 무리들이 세력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금하는 일이야말로 몹시 중요하다.”


이사의 논의는 점점 구체적으로 들어갔다.

“신이 청컨대, 사관은 진나라 기록이 아닌 것은 다 불사르라. 박사의 벼슬이 직무상 취급하는 것 이외에,

천하에서 감히 시경과 서경과 백가의 책을 간직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모두를 군의 수위에게 제출하여, 그 모두를 불사를 것.

감히 시서를 말하는 자가 있으면 시서를 저자에 버릴 것. 예로써 지금을 그르다 하는 자는 집안을 모두 사형에 처할 것.

관리로서 이상에서 말한 금지사항을 침범하는 자를 알면서 검거하지 않는 자도 죄는 같다.

명령이 내리고 30일 이내에 불사르지 않는 자는 이마에 문신을 새기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성을 쌓는 형벌에 처한다.

버리지 않는 것은 의약과 점(占)과 농업의 책이다. 만일 법령을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관리로써 스승으로 삼는다.”

진시황이 이를 채택하여 행한 것을 분서(焚書)라고 한다.


한편 갱유(坑儒)는 다음해인 35년의 일이다.

진시황은 불노장생을 원하여 신선의 재주를 익힌 방사를 사랑했다.

그 무렵 특히 눈을 끌어 후대한 것은 후생과 노생이었다.

그러나 재주의 효험이 나타날 경우 그 대접이 대단한 만큼, 그렇지 못할 경우의 위험도 컸다.

두 사람은 받을 것을 받아버리자, 진시황의 부덕을 마구 말하고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지금까지 한중이나 서발과 같은 방사에게, 큰 돈을 사기당한 진시황은, 이번에 다시 노생등이 은혜를 원수로 갚는 데 격노했다.

때마침 함양의 시중에 내보낸 첩자로부터, 괴상한 언행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학자들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화가 난 진시황은 어사에게 명하여 학자들을 남김없이 심문케 했다.

학자들은 죄를 서로 전가시켜, 다른 사람을 고발하고, 자기 자신을 도우려 했다.

그 결과 천하에 알리기 위한 징벌로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