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맘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2월 26일 (금) 09:4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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破竹之勢 파죽지세[편집]
破 깨뜨릴 파 竹 대 죽 之 갈 지 勢 형세 세
파죽지세(破竹之勢) 관련 설명[편집]
세력이 강하여 막을 수 없는 모양 또는 그 세력 진의 무제 함녕 5년, 진의 대군은 남하하여 옹에 육박했다. 진남대장군 두예는 중앙군을 이끌고 호북의 양양에서 강릉으로 육박, 서쪽인 사천에서는 왕준의 수군이 양자강을 타고 공격해 왔으며 또 왕혼의 군은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이 무렵 삼국 중 촉한은 이미 망하고 천하는 위의 뒤를 이은 진과 남방의 오와의 대립이었다. 진은 그 최후의 결전을 오에게 건 것이었다.이듬해인 태강 원년 2월 두예는 왕준의 군과 합류하여 무창을 빼앗고 여기서 제장을 모아 작전을 짰다. 어떤 자가 말했다.“지금은 봄도 제철에 접어들었습니다. 강수도 머지않아 범람하겠으므로, 이 무창에 오래 주둔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단 군을 후퇴시켰다가 오는 겨울에 다시 대거 진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이때 두예는 딱 잘라 말했다.“아냐,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 군사의 사기는 충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를 쪼개는 때와 같다. 두 마디, 세 마디씩 마디를 쪼개면 다음에는 칼날을 대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진다. 힘을 들일 필요도 없는 것처럼 왕성한 기세를 타고 있다. 이 호기를 놓쳐서는 안된다.”이렇게 말하고 있는 그는 곧 공격 준비를 했다. 얼마를 지나지 않아 3월이 되자 두예의 군은 오의 수도 건업으로 쇄도, 마침내 이것을 공략했다. 오왕인 손호는 손을 뒤로 결박당하고 얼굴만 내놓은 뒤 수레에 관을 싣고 사죄의 뜻을 표하면서 항복했다. 진의 통일은 이리하여 완성되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라고 할 만 했다.두예는 공에 의해 당양후가 되었으나, 조정은 측근으로 인의 장막이 처져 있었기 때문에 도리어 불우했다. 그는 그 후에도 강릉에 있으면서 수도를 복구하여 관개의 편의를 꾀하는 등, 이 지방 개발에 힘썼다. 그는 해박한 지식을 지녀 신기구를 발명하고, 또 상평창을 만들어 기근에 대비했으며 곡가 안정을 꾀하는 등 치정의 견식도 날카로웠다. 하나 무엇보다도 그는 놀랄 만큼 박학했다. 원정하는 도중에도 책을 손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무제에게 대답하여 「신은 좌전벽이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도, 또 춘추좌전집해를 저술하여 후세에 남기는 주석을 가한 것도 이 두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