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재는 어떤걸 분재라고 하는거죠?
분재는 어떤걸 분재라고 하는거죠?[편집]
전에 티비에서 분재를 감정하는게
나왔는데..
그냥 화분하고 분재하고 어떤 차이인지..
어떤걸 분재라고 하는지 도통 감이 안오네요
어떤걸 분재라고 하는거에요?
답변 :
분재란
나무를 분(盆)에 심어 가꾸는 일. 이와 같은 행위를 일반적으로 분가꾸기라고 한다. 나무를 분에 심어 가꾸어 즐기는 행위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분가꾸기의 경우와는 달리 몇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그 하나는 가꾸어지는 나무가 자연스럽고 고목다운 운치를 풍겨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분재는 나무의 아름다움만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며 그 나무를 바라볼 때 대자연이 그려내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이 연상되고 그 운치와 정서를 함께 느낄 수 있어야 된다. 즉, 작은 분 속에 오묘한 자연의 운치를 꾸며내는 것이 분재의 본질(本質)이라고 할 수 있다.
〔역 사〕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시대 세조때 ≪양화소록 養花小錄≫이 저술되기 이전에는 화훼나 식물 재배에 관한 전문 서적이 전혀 간행된 바가 없다. 다만 예로부터 분재는 주로 문인·묵객이 애완하는 대상이 되어왔기 때문에 그들이 남긴 문집에 수록된 시 속에 분재에 관한 것이 보일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분재의 역사를 더듬어보자면 이러한 문집들을 참고해야 하는데 그것도 고려시대 중기 이전에 저술된 것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는 물론 고려 초기의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중국의 경우, 711년에 세상을 뜬 당나라의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의 무덤의 벽화 속에 분재가 그려져 있다고 하니 600년대 말에 이미 분재를 가꾸어 즐기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라에서는 사절유택(四節遊宅)이라 하여 지체높은 이들이 철에 따라 돌아가면서 수려한 정원을 즐기는 놀이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볼 때 정원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분재도 통일신라시대에는 이미 중국으로부터 도입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고려시대 중기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에는 〈분중육영 盆中六詠〉이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사계화(四季花 : 지금의 월계화)를 비롯하여 석류나무·대나무·석창포(石菖蒲)·국화·서상화(瑞祥花)가 나오고 있다.
최자(崔滋)도 그가 지은 문장 속에서 분죽(盆竹)과 석창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석창포는 수반(水盤)에 백사(白沙)를 담아 심어 가꾸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을 보면 고려 중기에는 석창포와 대나무 등 창작(創作)을 가할 필요가 없는 초본식물(草本植物)을 소재로 삼은 분재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에 간행된 문집에서 분재에 관한 시나 문장이 보이는 것으로는 전녹생(田祿生)과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종학(李種學) 등의 저작이 있다. 전녹생은 〈영분송 詠盆松〉이라는 시를 남기고 있으며, 이색 역시 분에 심은 소나무를 읊고 있는데 그 속에 왕피(枉被)라는 말이 나온다.
규번이란 용이 서린 모양을 형용하는 말이다. 왕피나 규번 등의 말이 쓰인 것을 볼 때 이 무렵의 소나무분재는 굴곡이 심한 생김새를 가진 것을 높이 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이색과 이종학은 각기 몇 편의 분매시(盆梅詩)를 남겨 놓았다.
또, 이 무렵의 분재의 생김새를 보여주는 자료로는 자수박물관(刺繡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말기에 제작된 병풍이다. 네 폭 짜리 병풍의 첫째 폭에는 네모진 분에 심어진 노송(老松)이 수놓아져 있다. 괴석(怪石)이 곁들여져 있는 구도인데 노송의 가지의 배치와 생김새가 자연스럽고 이상적이다.
두번째 폭에는 깊은 사각분(四角盆)에 심어진 매화나무를 수놓았다. 셋째 폭에는 세 가지 식물을 수놓았는데 그 하나는 넓은 분에 심은 꽃나무이고 양가에는 각기 둥근 분에 심은 연(蓮)과 난이 보인다. 마지막 폭에는 포도나무분재와 함께 난을 곁들인 소나무가 깊은 사각분에 심어져 있는 모양을 수놓았다.
이상을 종합해볼 때 고려 말엽에는 소나무를 비롯하여 매화나무와 대나무가 분재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병풍에 나타난 노송의 수격(樹格)이 꽤 높은 것을 볼 때 고려 말엽에는 인위적으로 수형을 꾸미는 기술이 상당수준에 이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에는 우리 나라 유일의 원예고전(園藝古典)인 ≪양화소록≫이 강희안(姜希顔)에 의하여 저술된다. 이 책에는 노송을 비롯하여 만년송(萬年松 : 지금의 眞柏)·오반죽(烏班竹 : 지금의 烏竹)·매화나무·석류나무·사계화·산다화(山茶花 : 지금의 동백)·자미화(紫薇花 : 지금의 배롱나무, 일명 목백일홍)·철쭉나무·귤나무·석창포 등을 다루어놓았다.
나무마다 그 생김새와 특징, 그리고 번식하는 방법은 물론 어울리는 수형까지도 설명해놓았다. 그 내용을 음미해보면 이 무렵 분재를 가꾸는 기술이 크게 향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희안은 시·서·화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던 인물로서 그가 남긴 그림 가운데 〈분재도 盆栽圖〉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네모진 큰 분에 마치 괴석과도 같은 괴이한 생김새의 큰 고목이 심어져 있는 그림으로 옆에는 두 동자가 나무를 돌보고 있는 모습이 함께 그려져 있다. 동자의 키보다 나무를 월등히 크게 그려놓은 것을 보면 조선 초기에는 오늘날보다 몇 갑절 큰 분재를 즐겨 가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청나라로부터 들어온 고증학과 서양의 과학적 사고방식의 영향을 입어 실학이 대두하기 시작한다. 그로 인하여 현실적인 문제를 다룬 서적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영농(營農)에 관한 백과전서인 ≪산림경제 山林經濟≫ 등이 있다.
홍만선(洪萬選)이 지은 ≪산림경제≫에는 분재로 가꾸어지는 식물로서 노송·만년송·대나무·매화나무·국화·산다화·치자나무·서향·석류나무·철쭉나무·월계화·해당화(海棠花)·배롱나무·석창포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 가꾸는 방법이나 관리상의 주의 사항 등은 거의 모두 강희안이 지은 ≪양화소록≫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다. 한편, 박세당(朴世堂)의 ≪색경증집 穡經增集≫에는 매화나무·철쭉·월계화·옥잠화·추해당(秋海棠)·미인초(美人蕉)의 여섯 가지 식물의 재배 요령이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조선 중기의 분재는 나무의 종류나 가꾸는 기술에 있어서 초기에 비하여 별로 발전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태를 보이는 것은 연산군 때를 시발점으로 하여 길게 계속되었던 사색당쟁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영향을 입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색경증집≫에는 종분취경(種盆取景)이라 하여 고목의 운치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서 분토(盆土)에 이끼를 생겨나게 하는 요령이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과 종분취경이라는 제목을 보면 분재 관상의 참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분경통론에는 분재와 자연과의 관계 및 분재의 예술성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분경품제는 분재의 품위를 논한 것으로서 노송과 매화나무·대나무의 세 가지를 삼우(三友)라 하여 최고로 손꼽았다. 끝으로 분품은 분재에 쓰이는 다양한 분의 종류를 평하였다.
치수영로기법은 고목다운 운치를 가꾸어내기 위한 방법을 설명한 것으로 오늘날 실시되고 있는 방법과 다를 것이 없다. 안분법에는 가꾸는 자리에 관한 문제가 다루어져 있고 배분법은 관상을 위한 분재의 배열요령이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교장법은 겨울철의 보호와 관리 요령에 관한 것이다.
한편, 분재로 가꾸어졌던 나무의 종류도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한층 더 다양해지는 경향을 보이며 그와 함께 서대초(書帶草)나 길상초(吉祥草)·석창포 등의 초본식물도 적지 않게 가꾸어진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는 분재를 가꾸는 취미가 널리 보급되어 수종(樹種)이 다양해지는 한편 분재에 어울리는 화분의 생산이 시작되며 그와 함께 분재 가꾸기의 구체적인 기술을 서술한 책자도 간행되었다.
분재는 어떤걸 분재라고 하는거죠? 관련있는 단어[편집]
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