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의 이름, 종류에도 어떤 의미가 있나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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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의 이름, 종류에도 어떤 의미가 있나요?(1)[편집]

  백설기, 인절미, 가래떡 등   떡에도 여러가지가 있고 만드는 방법도 다양한데 이런 '떡'의 이름과 종류에도 각각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려주세요~  

답변 :
















삼국시대 이전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떡을 먹었을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삼국이 성립되기 이전인 부족국가 시대부터 떡을 만들어 먹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대에 떡의 주재료가 되는 곡물이 생산되고 있었고, 떡을 만들어 먹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대에 떡의 주재료가 되는 곡물이 생산되고 있었고, 떡을 만드는데 필요한 갈판과 갈돌, 시루가 당시의 유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황해도 봉산 지리탑의 신석기 유적지에는 곡물의 껍질을 벗기고 가루로 만드는데 쓰이는 갈돌이, 경기도 북변리와 동창리의 무문토기시대 유적지에서는 갈돌 이전 단계인 돌확이 발견된 바 있다. 
그리고 나진 초도 조개더미에서는 양쪽에 손잡이가 달리고 바닥에 구멍이 여러개 난 시루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우린 민족은 일찌감치 삼국시대 이전부터 곡물을 가루로 만들어 시루에 찐 음식을 만들어 먹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여기에서 곡물을 가루로 만들어 시루에 찐 음식이라면 '시루떡'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루떡을 및 시루에 찐 떡을 쳐서 만드는 인절미, 절편 등 도병류를 즐겼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에는 쌀의 생산량이 그다지 많지 않아 조, 수수, 콩, 보리 같은 여러 가지 잡곡류가 다양하게 이용되었을 듯 싶다. 상고시대의 우리 음식은 일본에도 그대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에는 떡 만드는 방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떡의 모양새를 짐작하게 한다. '대두병은 떡 한 장에 쌀 두 홉, 콩 한 홉을 두고, 소두병은 쌀 두 홉으로 떡 한 장을 하고 장마다 팥 두 홉씩을 섞는다'라고 하여 콩시루떡과 팥시루떡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도 '이리모치히 기름에 지지는 떡'라는 전병에 관한 설명도 있어,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우리 민족은 시루떡, 치는 떡, 지지는 떡 해서 다양한 떡을 만들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떡은 무천, 영고, 동맹과 같은 제천의식에 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게 되면 사회가 안정되면서 쌀을 중심으로 한 농경이 더욱 발달하게 된다. 이 시기에 쌀을 주재료로 하는 떡이 더욱 일반화되었음은 물론이다. 고구려 시대 무덤인 황해도 안악의 동수무덤 벽화에는 시루에 무엇인가를 찌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한 아낙이 오른손에 큰 주걱을 든 채 왼손의 젓가락으로 떡을 찔러서 잘 익었는지를 알아보는 듯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다른 여러 고분에서도 시루가 출토되기도 했고 , 등의 문헌에도 떡에 관한 이야기가 유달리 많아 당시의 생활에서 떡이 차지했던 비중을 짐작하게 한다. 

신라본기 유리왕 원년(298년)조에는 유리와 탈해가 서로 왕위를 사양하다 떡을 깨물어 생긴 잇자국을 보아 이의 수효가 많은 자를 왕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성스럽고 지혜있는 사람이 이의 수효가 많다고 여겨 떡을 씹어서 시험한 결과 결국 유리가 잇금이 많아서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같은 책 백결선생조에는 신라 자비왕대(458~479년) 사람인 백결선생이 가난하여 세모에 떡을 치지 못하자 거문고로 떡방아 소리를 내어 부인을 위로한 이야기가 나온다. 

깨물어 잇자국이 선명히 났다던지 떡방아 소리를 냈다든지 하는 기록으로 보아 여기서 말하는 떡은 찐 곡물을 쳐서 만든 흰떡, 인절미, 절편 등 도병류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백결선생이 모여 세모에 떡을 해먹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다는 기록은 당시에도 이미 연말에 떡을 해먹는 절식 풍속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효소왕대(692~702) 죽지랑조에는 설병이라는 떡이 나온다. '설'은 곧 '혀'를 의미하므로 혀의 모양처럼 생긴 인절미나 절편, 혹은 그 음이 유사한 설병, 즉 설기떡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의 발해 사람들도 시루떡을 해먹었다. 
발해국지장편 권17, 식화고에 '영양현 지방의 배는 작기는 하지만 맛이 아주 좋아서 이것과 포도를 넣어 찐 시루떡은 볼품과 맛이 더할 수 없이 뛰어나다'는 얘기가 언급되어 있다. 전 시대에 이어 떡은 중요한 제사음식의 하나로 사용되기도 했다. 가락국기 수로왕조에 '…세시마다 술, 감주와 병, 반, 과, 채 등의 여러 가지를 갖추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불교문화는 고려인들의 모든 생활에 영향을 미쳤고 음식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육식을 멀리하고 특히 차를 즐기는 음다 풍속의 유행은 과정류와 함께 떡이 더욱 발전하는 계기를 만즐어 주었다. 이와 더불어 권농 정책에 따른 양곡의 증산은 경제적 여유를 가져다 주어 떡문화의 발전을 더 한층 촉진하게 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 시기에는 떡의 종류와 조리법이 매우 다양해진다.
 여러 기록에 등장하는 떡의 종류들을 한번 살펴보자. 중국의 에 '고려율고'라는 떡이 나오는데, 한치윤의 에도 고려인이 율고를 잘 만든다고 칭송한 견문이 소개되고 있다. 율고란 밤가루와 찹쌀가루를 섞어 꿀물에 내려 시루에 찐 일종의 밤설기이다. 이수광은 그의 저서 에서 '상사일에 청애병을 해먹는다'고 하였다. 어린 쑥잎을 쌀가루에 섞어 쪄서 만든다고 하였으니 쑥설기인 셈이다. 
이 외에도 송기떡이나 산삼설기 등이 등장한다. 즉 이전에는 쌀가루만을 쪄서 만들던 설기떡류가 주를 이루었다면 이 시기에 와선 쌀가루 또는 찹쌀가루에 밤과 쑥 등을 섞어 그 종류가 훨씬 다양해졌다. 또한 이색의 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단자류인 수단을 만들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수단이란 쌀가루 혹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경단과 같이 만든 다음 끓는 물에 삶아 냉수에 헹궈서 물기를 없앤 뒤 꿀물에 넣고 실백을 띄운 것을 말한다. 이색은 유두일에 먹는 수단에 대해 '…백설처럼 흰 살결에 달고 신맛이 섞였더라…오래 씹으면 청량한 맛이 몸을 적시리…'라고 읊고 있다. 이 책에는 수숫가루를 반죽하여 기름에 지져 팥소를 사이에 넣고 부친 수수전병도 나온다. 
불교문화와 더불어 몽고와의 잦은 교류도 고려인의 음식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밀가루에 술을 넣고 부풀려 채소로 만든 소와 팥소를 넣고 찐 증편류의 상화가 도입되었는데, 고려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되는 증편의 시원인 이식과 비슷한 형태였다. 고려가요 중 은 상화를 파는 전방이 따로 있었음을 말해주어 당시 고려인들이 상화를 꽤 즐겼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떡의 종류도 다양해졌을 뿐만 아니라 떡이 시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일상식으로서 자리잡아 나간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에는 광종이 걸인에게 떡으로 시주하였으며, 신돈이 떡을 부녀자에게 던져 주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상사일에 청애병을 해먹는다는지 유두일에 수단을 해먹는다는 기록은 떡이 절식 음식으로 점차 자리잡아 갔음을 말해준다.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농업기술과 조리가공법의 발달로 전반적인 식생활 문화가 향상된 시기이다. 이에 따라 떡의 종류와 맛도 더 한층 다양해졌다. 특히 궁중과 반가를 중심으로 발달한 떡은 사치스럽기까지 하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곡물을 쪄 익혀 만들던 것을 다른 곡물과의 배합 및 과실, 꽃, 야생초, 약재 등의 첨가로 빛깔, 모양, 맛에 변화를 주었다. 조선 후기의 각종 요리 관련서들에는 매우 다양한 떡의 종류가 수록되어 있어 이러한 변화를 짐작하게 한다. 각 지역에 따라 특색 있는 떡이 소개되어 있는 것도 이채롭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관혼상제의 풍습이 일반화되어 각종 의례와 크고 작은 잔치, 무의 등에 떡이 필수적으로 쓰였다. 또 고려시대에 이어 명절식 및 시절식으로의 쓰임새도 증가하였다. 이때 주로 만들어진 서기떡류로는 기존의 백설기, 밤설기, 쑥설기, 감설기 외에 석탄병, 잡과점설기, 잡과꿀설기, 도행병, 꿀설기, 석이병, 괴엽병, 무떡, 송기떡, 승검초설기, 막우설기, 복령조화고, 상자병, 산삼병, 남방감저병, 감자병, 유고, 기단가오등이 등장하였다. 
특히 기단가오와 유고는 이 시기에만 만들어졌던 떡이다. 기단가오는 메조 가루에 삶은 대추, 콩, 팥을 섞어 무리로 찐 떡(, 1815년)으로, 차진 메조가 생산되는 북쪽 지방의 향토떡이기도 하다. 한편 유고는 참기름에 소금을 약간 넣어 쌀가루에 섞은 다음 잣과 대추를 잘게 썰어 고명으로 얹어 시루에 찐 것으로(, 1800년대 중엽) 오늘날의 백편과 유사하다. 시루떡 또한 팥시루떡, 콩시루떡 외에 무시루떡, 꿀찰편, 청애메시루떡, 녹두편, 거피팥녹두시루편, 깨찰편, 적복령편, 승검초편, 호박편, 두텁떡, 혼돈병 등이 나타났다. 
이중 두텁떡은 찹쌀가루를 쩌서 유자청 등의 소를 박고 볶은 팥가루고물을 얹어 찐 것으로 조리법이 한층발달하여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최고의 떡이다. 의 혼돈병은 찹쌀가루, 승검초가루, 후춧가루, 계핏가루, 건강, 꿀, 잣 등을 사용하여 두텁떡과 유사하게 조리한 것이다. 그러나 (1766년)의 혼돈병은 이름만 같을 뿐 내용은 매우 다르다. '메밀가루를 꿀물에 타서 죽처럼 하여 질그릇 항아리에 넣어 입구를 단단히 봉하고 겨불 속에 묻는다'고 하여 제법이나 재료가 다른 떡들과 구별되고 있다. 찌는 떡뿐만 아니라 치는 떡도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인절미는 찹쌀을 쪄서 치는 단순한 형태였으나 점차 쑥, 대추, 당귀잎을 넣고 쳐서 색다른 맛을 음미하게 되었다. 
또한 조인절미라하여 처음부터 찹쌀에 기장조를 섞어 찌기도 하였다. '긴 다리같이 만든 떡(1849년)'이었던 흰떡은 '손가락 두께처럼 하여 한 치 너비에 닷푼 길이로 잘라 (연대미상)' 만든 골무편이나 산병, 환병 등으로 여러 가지 모양을 가지게 되었다. 절편은 쑥, 수리취, 송기 등을 첨가하고 떡살로 무늬를 박아 모양과 색을 더욱 아름답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소를 넣고 반달 모양으로 빚은 개피떡이 문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흥미롭다. (1800년대 중엽)의 개피떡은 '흰떡 치고 푸른 것은 쑥 넣어 절편 쳐서 만들되 팥거피고물하여 소 넣어, 탕기 뚜껑 같은 것으로 떠내고'라고 하여 오늘날과 매우 유사했음을 알 수 있다. 
전병류도 차수수전병에서 더덕전병, 토란병, 산약병, 서여향병, 유병, 권진병, 송풍병 등으로 재료의 사용이 자유로워졌다. (1670년경)에는 '젼화법'이라 하여 두견화(진달래), 장미꽃, 출단화의 꽃을 찰가루에 섞어 지져내는 떡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만드는 방법이 지금과 거의 같다. 그리고 주악이 전병류의 하나로 새로이 등장하였다. 처음에는 조악전이라 하여 '백미를 가지고 가루로 만들어 설탕물로 반죽하고 설탕가루로 속을 넣어 배가 약간 볼록하게 하여 향기로운 기름에 지져서 먹는(, 1740년대)' 것이었으나 이후 주재료가 찹쌀로 바뀌었다.
 다만 (1815년)에 '소를 넣어 만두과처럼 가를 틀어 살 잡아 빚어' 만들라고 하였으니 현재와는 형태가 다소 달랐을 것이다. '빈자떡'은 기름에 지지는 떡으로 에 비로소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의 빈자떡은 '녹두를 뉘없이 거피하여 되직하게 갈아서 번철에 기름을 부어 끓으면 조금씩 떠 놓아 거피한 팥을 꿀에 말아 소로 넣고, 또 그 위에 녹두 간 것을 덮어 빛이 유자빛같이 되게 지져야 한다'고 하여 현재의 형태와는 달리 순수한 떡에 보다 가까운 것이었다. 경단 및 단자류는 조선시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떡의 종류이다. 
경단류는 (1680년경)에 '경단병'으로 처음 등장하여 , (1800년대 말) 등 이후의 문헌에도 나타나고 있다. 경단병은 찹쌀가루로 떡을 만들어 삶아 익힌 뒤 꿀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청향을 바르고 그릇에 담아 다시 그 위에 꿀을 더한다고 하였다. 단자류는 에 '향애단자'로 기록된 것이 최초이다. 이후 밤단자, 대추단자, 승검초단자, 유자단자, 토란단자, 건시단자, 마단자, 귤병단자, 꿀단자 등 종류가 다양해 졌다. 이 외에도 송편이 만들어져 추석에 즐겨 먹는 명절 음식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근대이후

19세기말 이후 진행된 급격한 사회 변동은 떡의 역사마저 바꾸어 놓았다. 산식이자 별식거리 혹은 밥 대용식으로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왔던 떡은 서양에서 들어온 빵에 의해 점차 식단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또한 생활환경의 변화로 떡을 집에서 만들기보다는 떡집이나 떡방앗간 같은 전문업소에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지던 떡의 종류는 전문 업소에서 주로 생산되는 몇 가지로 축소되어 가는 형편이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러나 떡은 아직도 중요한 행사나 제사 등에는 빠지지 않고 오르는 필수적인 음식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시루떡류의 경우 콩을 섞어 만든 콩버무리떡, 콩설기, 콩시루편, 쇠머리떡 등이 서민들이 즐겨 해먹던 떡이었다. 특히 인절미는 찰밥을 지어 쳐서 만드는 법과 찹쌀가루를 쪄 쳐서 만드는 두 가지 방법이 함께 이용되어 왔으나 근대 이후에는 간편한 후자 방법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1913년)의 증보판인 (1952년)에는 송기개피와 세 가지 색의 개피떡을 한 데 붙인 셋붙이도 등장하였다. 
절편을 송편 모양으로 빚어 다시 찐 재증병도 등장하였는데 지금은 사라진 매우 단명한 떡이다. (1943년)에서는 70여종의 다양한 떡이 소개되는데 토란을 말려서 가루내어 찌거나 송편으로 만드는 토련병, 백합뿌리를 섞어 찌는 백합떡, 여러 가지 약재를 섞어 만든 신선부귀병, 흔떡, 북떡, 석류, 수수거멀제비 등 특이한 이름의 떡들이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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