臥薪嘗膽 와신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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臥薪嘗膽 와신상담[편집]

   누울 와      섶 신      맛볼 상      쓸개 담  

와신상담(臥薪嘗膽) 관련 설명[편집]

섶에 누워서 쓸개를 맛본다는 뜻   주경왕(周敬王) 24년 吳王 합려는 越王 구천과 추리의 싸움에서 싸워, 월의 군략에 걸려 패했다. 합려는 적의 화살로 손가락에 상처를 입었는데 패주하는 바람에 충분한 가료를 받지 못한 채 겨우 경이라는 곳까지 도망쳤을 때, 갑자기 그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 임종 때 그는 반드시 월에 복수를 하여 자기의 분함을 풀어 주도록 태자인 부차에게 유명(遺命)을 했다.아버지의 뒤를 이어 吳王이 된 부차의 귀에는 언제나 그 아버지의 유명이 들렸다. 눈에는 언제나 통분하던 임종시의 아버지 형상이 보였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원한을 푸어야겠다는 굳은 결의로 밤마다 장작 위에 누워(臥薪), 아버지의 유한(遺恨)을 새롭게 하며 복수심을 갈고 갈았다. 뿐더러 그는 자기 방에 출입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아버지의 유명을 소리쳐 말하게 했다.“부차여, 네 아비를 죽인 자는 월왕 구천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네,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3년 이내에는 반드시 원수를 갚겠습니다.”부차는 그럴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임종 때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한 말과 똑같은 말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낮이고 밤이고 복수를 맹세하고, 오로지 병(兵)을 훈련시켜 때가 이르기를 기다렸다. 월왕 구천은 그것을 알자, 기선을 잡아 오를 치려고 그 어진 신하 범려의 참된 간언도 듣지 않고 군사를 일으켰다. 부차는 이것을 맞아 공격, 양군은 오의 부초산에서 격돌했으나 부차의 격한 복수의 일념으로 단련된 오군에 의해 월군은 대패하여 구천은 패잔병을 읶르고 겨우 회계산으로 도망쳤다.오군은 추격해서 그 산을 포위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구천은 나라를 버리고 오왕의 신하가 된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자원했다. 「분전해서 죽기는 도리어 쉽다. 그러나 죽으면 그 뿐이다. 월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는 살아서 치욕을 참는 수밖에 없다」라는 범려의 충언을 따른 것이다.월왕 구천에게 항복 받은 오왕 부차는 승자의 도량으로 구천을 용서했다. 구천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는 있었으나, 그 나라는 이제 오의 속령이고 스스로는 오왕의 신하가 된 몸이다. 전에 부차가 장작 위에 누워 죽은 아버지의 한을 되새기듯 지금 구천은 언제나 곁에 쓸개를 매달아 놓고 기거할 때나 언제고 그 쓴 맛을 핥아(嘗膽)서 치욕적인 항복을 되씹어 복수심을 자극했다.그는 또 스스로 경작하고 부인은 스스로 길쌈하며 조의 조식에 만족했으며 사람을 잘 써서 그의 충언을 듣고 언제나 마음을 닦는 고난을 참아 오로지 국력의 재흥을 꾀했다. 하나 그 복수는 용이하게 달성될 수가 없었다. 구천이 회계산에서 오에게 항복한 지 12년이 지난 해의 봄, 오왕 부차는 기의 황지라는 곳에서 제후를 모아 놓고 천하의 패자가 되었다. 부차는 득의에 차 있었다. 그때까지 오래도록 은인자중하고 있던 구천은 범려와 함께 부차가 없는 틈을 타 느닷없이 오나라로 공격해 들어갔다. 구천은 오의 잔류군을 크게 격파했으나 아직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는 없었다. 그 후 4년, 구천은 다시 오를 공격했다. 입택이라는 곳에서 월군은 오군에 대승하고 그대로 오에 머물러 각지에서 오군을 패주시켰다. 그리하여 2년 후 다시 입택에 집결한 월군은 오의 수도인 고소에 육박, 이듬해 오왕 부차를 고소성에 포위하여 마침내 항복받았다.겨우 회계의 치욕을 설욕한 구천은 부차를 용동으로 귀양보내어 그 곳에서 여생을 살게 하려 했으나, 부차는 구천의 호의를 거절하고 스스로 목을 쳐 자살했다. 그리하여 오를 대신하여 패자가 되었다.복수심을 품고 언제나 그것을 생가하며 신고(辛苦)하는 것을 「」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오와 부차와 월왕 구천의 고사에 의한 것이다. 또 오와 울이 서로 적대시 한 데서 극히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吳越之間」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