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旦 월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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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旦 월단[편집]

   달 월      아침 단  

월단(月旦) 관련 설명[편집]

어떤 사람인지 비평하는, 즉 다시 말하자면 인물 비평을 한다는 것을 월단평(評) 또는 월단()이라고 한다.  

후한도 전한처럼 황후의 일족과 환관의 세력에 골치를 앓았었다.

제 10대인 환제 때 그 환관이 결속하여 기개와 절조가 있는 선비 2백여 명을 죽은 전당고가 일어나고

다음 영제 때도 7백여 명이 살해되고 다시 그 문하생에서 친구 친척까지 유형이나 투옥을 당한 후당고가 생겼다.

이런 사건 때문에 정치는 어지러워지고 한실의 위광도 쇠해져 천하는 소연해지기 시작했으나, 이것에 박차를 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것은 「태평도(太平道)」라는 사교의 유행이다.

태평도란 하북(河北)의 장각이라는 사나이가 시작한 당시의 신흥 종교이나, 황제나 노자의 학설에 엉터리 이론을 붙인 것으로 정치가 올바르지 못하면

민중이 이런 것에서까지 구원을 찾게 되는 것으로 어쨌든 천하가 소연해진 틈을 타, 순식간에 수십 만의 신도를 모으게 되었다.

이렇게 세력을 얻은 장각, 이번에는 천하를 자기의 소유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야망을 일으켜 영제 17년, 종도(宗徒)를 이끌고 군사를 일으켰다.

그 기세가 성해서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반란군은 자기들을 표시하기 위해 황색건(黃色巾)을 쓰고 있었으므로 황건적(黃巾賊)이란 부르고,

이 난을 「황건적의 난」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쯤 되면 궁정 안에서 권모술수에 의해 남을 해치는 재주 밖에 없는 환관으로서는 손을 쓸 수도 없었다.

당고(黨錮)의 화가 일어났을 때 잡아 감금했던 인사들을 허겁지겁 풀어주어 토벌을 시킴과 동시에 전국의 유력자들에게 누구누구를 가리지 않고 토벌을 명했다.

무슨 일이 생겼으면 하고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던 야심만만한 패거리들은 다투어 군사를 일으켰으나,

그 중에도 지모(智謀)에 뛰어난 조조는 반란군을 크게 격파하고 천하에 이름을 올렸다.

그 밖의 사람들도 용전하여 각지에서 반란군을 마구 무찔러 격파하고, 수령 장각도 병사하여 그렇듯 기세를 올리던 대란(大亂)도 겨우 끝장이 났다.

그러나 군사를 일으켰던 패거리들은 들어올렸던 주먹을 내리칠 곳이 없다.

그래서 거병(擧兵)의 명목을 「횡포한 환관을 응징한다」로 변경하고 군사들을 그대로 이끌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영제가 재위 20년에 죽자 원소라는 장군이 먼저 일어나 군사를 이끌고 궁중으로 난입하여 환관이란 이름이 붙은 자 2천여 명을 모조리 죽였는데

다시 동탁이란 장군도 다음에 즉위한 유제를 쿠데타로 추방시켜 후한 왕조에 종지부를 찍고 마침내 삼국지 이야기의 발단으로 들어간다..

황건적을 토벌하여 큰 공을 세운 조조는 젊었을 때부터 두목감으로 가사는 통 돌보지 않고, 호걸들과 교제하면서 좋아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무렵 하남성 여남이라는 곳에 허소와 그의 사촌형 정이라는 두 사람의 명사가 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매달 초하룻날, 향당의 인물을 골라서는 비평을 하고 있었다.

그 비평이 극히 적절했으므로 「여남의 월단평」이라고 항간에서 평판이 되어 들으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이 인물평이 너무나도 유명했으므로 이로부터 인물 비평을 「월단평」 간단히 「월단」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 평판을 들은 조조는 곧 허소를 찾아가 물었다.

“이 조조라는 사람은 어떤 사나인지 비평을 해주지 않겠나?”

난폭자로 이름이 높은 조조라 허소도 조심해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으나,

조조의 성화에 못 이겨 겨우 입을 열었다.

“태평시절에는 당신이 유능한 관료에 지나지 않으나,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난세에 알맞은 간웅(姦雄)이 될 인물이다.(治世能臣, 亂世姦雄)”이 말을 듣고 조조는 즐거워했다.

그래서 황건적을 토벌하기 위해 거병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 때 조조가 허소에게 가지 않았더라면, 아니 허소가 그런 비평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혹 「삼국지」는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