泰山北斗 태산북두[편집]
泰 클 태 山 뫼 산 北 북녘 북 斗 말 두
태산북두(泰山北斗) 관련 설명[편집]
높은 태산과 북두칠성처럼 세상에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 당나라 헌종 때. 나라에서 불골을 맞아들인 일을 논란했다가 중앙의 벼슬자리를 쫓겨났으나 4년 만에 다시 경조윤으로 들어가 이듬해에 세상을 떠난 대시인 한유의 이야기다.그는 하남성 태생으로 두 살 때 고아가 되었으며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남달리 학업에 열중해서 덕종 때 이미 25세의 약관으로 진사에 급제한 이래 관운을 타고 이부의 대신까지 올라갔던 사람이다. 천성이 강직하고 결백하기 때문에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해서는 주장을 굽힐 줄 모르고 주저없이 임금에게 간해서 때로는 좌천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그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 앞에서 말한 불골 관계의 사건으로 10대 임금 헌종의 원화 14년에 임금이 소위 불골이라는 것을 궁중으로 모셔 들여서 사흘 동안을 안치했다가 여러 사찰로 보낸 일에 대해서 준열히 간한 것이다.“불교는 사교이며 부처님의 뼈다귀 같은 것은 강물에다 던져서 흘려 보내야 옳다”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통렬히 비난 공격을 했던 이른바 불골을 논하는 표를 올렸던 까닭에 임금의 노여움을 샀던 것이다.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두터웠던 헌종의 비위를 여지없이 뒤틀리게 만들어 놓았으니 무사할 수가 없었다. 멀리 광동땅 조주자사로 좌천이 되어 사실상 정배를 갔던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이 때 한유가 좌천되어 가는 길에 람관에 이르러 「질손상에게 고하노라」는 다음 시는 지금도 세계 여러 나라에까지 애송되고 있다.“구름은 진령에 가로 누었으니 집은 어디에나 있는가? 흰 눈은 람관을 뒤엎어 말은 갈 길을 모르도다.” 4 년만에야 다음 11대 목종에 의하여 다시 중앙으로 올라가서 병부와 이부의 시랑 벼슬까지 했다. 57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관리로서의 모범된 생애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찬란한 일생이 후세에 더욱 빛을 남기고 있다. 퇴지 한유는 더욱이 죽은 뒤에 예부상서를 하사 받고 문이라는 시호까지 추증된 인물이다. 그는 문장의 모범을 선진에서 찾으려 했으며 그가 나타나기까지 당나라 7,8대에 걸쳐서 성행했던 이른바 병문을 타파하고 육조시대의 악습을 또한 두들겨 부수었다. 그의 문장은 맹자와 겨룰 수 있다고 격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여하튼 당나라 300년을 통해서 제 일인자가 된 것은 물론이고 중국의 고금을 통해서도 굴지의 대문장가로 역사의 한 토막을 장식하였다. 특히 내용을 위주로 인간미에 넘쳤으되 논리적 질서를 부여한 한퇴지의 문장이 당․송 팔대가문의 첫머리에서부터 6권까지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 스스로 이름 지은 고문으로서의 진가가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한다. 이 한유에 관한 사실을 기록한 서적으로 당서의 한유전이 있거니와 그 속에 수록된 찬사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당나라가 일어난 후로 한유는 육경(六經 - 시, 서, 역의 각 경과 춘추, 예기, 악기)의 문장을 가지고 모든 학자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도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한유가 죽은 뒤에는 그의 학문과 문장이 더욱 흥성해서 사람들은 그를 태산북두처럼 우러러 존경하였다.」 태산은 물론 큰 산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나 중국의 오악 가운데 하나로 치는 명산으로서 동악태산 실제로 산동성에 솟아 있는 산의 이름이다.마치 우리 나라에서 백두산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고래부터 영산으로 우러러 보고 있다. 그리고 북두는 북진을 지적한 것으로 논어에도 「북진은 제 자리에 있어 뭇별이 그를 바라봄과 같도다」라고 했듯이 무수한 별의 중심으로 온 하늘의 왕좌와 같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뛰어난 인물과 자주 비유되었다. 태산북두라면 하나의 분야에서 만인의 존경과 칭송을 받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요즈음의 우리 사회에서는 「태두」라고 생략하여 사용하며 특히 학술 방면의 권위자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