脾肉之嘆 비육지탄
脾肉之嘆[편집]
비육지탄
(脾肉之嘆) 비육지탄 관련 설명[편집]
성공할 기회를 잃고 허송 세월하는 것을 탄식함
(비자의 좌부는 骨) 후한 시대의 건안 원년, 조조는 헌제가 도읍을 옮겨 낙양에서 허창으로 떠나도록
일을 꾸민 다음 이를 맞이하여 자칭 대장군이 되고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이 때 유비는 바야흐로 인품과 용맹을 떨쳐 주목을 받았으나
조조의 간계로 여포와 원술의 합동 공격을 받고 힘에 몰려서 조조에게 의탁하는 신세가 되었다.
스스로 한나라 황실의 후예라 자처하고 언제든지 한나라의 부흥을 이룩하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던 유비는
이 때 거기장군으로 있던 장수 동승과 결탁하여 은밀히 조조를 죽을 계획을 세웠으나 그만 탄로되어 위길일발의 지경에서
간신히 탈출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삼국지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유비는 기주로, 여남으로 전전하다가
무수한 전투를 겪는 사이 6년이란 세월이 덧없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조조와 어깨를 겨룰만큼 큰 세력으로 진출한 사람은
강동 지바의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차지한 손권뿐이었다. 유비는 다시 조조에게 쫓겨 형주의 유표에게로 갔다.
10년 가까운 세월은 한결 같이 비운의 연속이었다.
이와 같은 유비의 불우한 운명을 지켜보면서 조조는 원술․원소․여포 등의 군사를 무찌르고 하북 일대를 제압하였다.
이에 대항할 만한 세력이라면 손견의 뒤를 이은 오나라의 손권 정도일 뿐 유비가 신세를 지고 있는 유표도 근근히 자기 지반이나 유지하고 있고
천하를 넘보는데는 부족한 재목이었다. 그런 인물 밑에서 객장이라는 형식으로 신야의 조그마한 성 한 채를 맡았을 따름이니
유비의 울적한 마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게다가 나이도 이미 50을 바라보기에 이르렀다. 관우․장비 등 호걸들도 있었으나 그들 역시 확고한 지반조차 없었다.
‘언제 말 위에 올라 앉아서 천하를 호령하고 한실의 재건 부흥을 이룩하게 될까?’ 유비는 이런 생각으로 한숨만 쉬면서 자신을
스스로 측은하게 여겼다.어느날, 유표와 같이 앉았다가 안쪽 복숭아뼈에 살이 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무슨 꼴이냐? 언젠가는 말위에 올라 앉아 천하를 호령할 내가…….”이렇게 중얼거린 유비는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술상을 대하고 앉는 순간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7척 5촌이라는 거구 장신의 대장부가 홀연히 흘리는 눈물을 주체 못하고
고개를 늘어뜨린 모습을 물끄러미 마주보던 유표가 이상히 여기며 물었다.
“도대체 웬 일이오?”“아무 것도 아니오. 그저 50평생을 말 안장에서 떠난 적이 없어서 이 복숭아뼈 안쪽에는 살이 붙어본 예가 없었는데
지금 보니 이렇게 비지살이 쪄 있소 그려. 말을 타 본지 오래요, 세월을 허송하는 사이에 어느덧 몸마저 노년이 되려 하니 마음이 어찌 심난치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나 봅니다.”문자 그대로 비육지탄이었다. 그러고 또 몇 해가 하염없이 흘러 유표마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종은 원수 조조에게 항복을 했다. 바로 그 때가 헌제 13년 겨울. 유비는 용약 손권과 손을 잡고 숙원이던 조조와의 대결을 감행하여
유명한 적벽 싸움으로 일거에 이름을 떨치고 동시에 형주를 차지했다.나아가 15년에는 양자강 중류의 묘진인 강릉으로 진출하여 장차 위나라의
조조, 오나라의 손권과 마찬가지로 촉나라의 유비로서 천하를 호령할 만한 소지를 확고히 했다. 후한 말 헌제 24년, 한중을 점령한 유비가 왕을 칭하자,
이듬해 정월에 조조는 죽고 다시 이듬해인 서기 221년에 유비는 드디어 제위에 올라 소열제로서 촉한시대를 이루었다.유비가 강릉에 대군을 몰고 성난 파도처럼
진출해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조조는 마침 붓글씨를 쓰고 앉았다가 아찔해서 부지불식간에 붓을 떨어뜨리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어찌 되었건 10년 넘는 세월을 비육지탄으로 고심참담 끝에 촉한이라는 새 나라를 세우고 제왕으로 군림했던 유비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의리 용맹에 살았던
그의 일대를 생각할 때 비육지탄은 더욱 실감나는 말이다.